[뉴스토피아 편집국] 이솝 우화 중 ‘여우와 두루미’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우와 두루미는 친구다. 여우는 두루미를 초대해 자신이 평소 먹던 평평한 접시에 담아 대접한다. 긴 부리 때문에 먹지 못한 두루미는 여우를 초대해 길쭉한 병에 음식을 담아 대접한다. 이와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들에서 인과응보 혹은 역지사지 등의 교훈이 전해지고 있다.
만약 두 친구에게 배려와 존중이 있었다면 여우는 길쭉한 병에 음식을 담았을 터이고 두루미 역시 접시에 담긴 음식이라도 감사히 먹었을 것이다. 눈치가 없는 여우는 ‘두루미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닌가보다’라고 생각하고 기분이 상한 두루미는 그런 여우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되갚는다. 여우가 심술을 부리며 골탕 먹일 의도였다는 해석도 있다. 아무리 순수한 의도여도 받는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 않으면 진정한 배려라고 보기 어렵다. 그냥 자기만족일 뿐이다.
애초에 시작된 식사 초대가 복수극이 된 이유는 배려와 존중이 없는 ‘보여주기 식’ 관계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여우와 두루미의 관계가 많다. 심지어 좋은 의도로 출발하는 ‘선행’도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거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혜택을 통해 자신을 과대포장하는데 이용하기도 한다.
스테이크를 젓가락으로 먹든 김치를 포크로 찍어 먹든 뭐가 큰 대수냐고 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 우리 사회는 형식적인 절차를 중요시한다. 결과에 집착하고 좋은 의도가 안 좋은 결과를 초래했을 때 관대하지 못하다. 특히 자신의 허물에는 관대하지만 상대의 잘못은 엄격하게 평가하고 이를 ‘내로남불’이라 주장하며 끊임없는 ‘보여주기식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보복을 이어가는 정치행보과 전시행정은 늘 반성없이 반복되는 여우와 두루미의 관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하트마 간디는 ‘눈에는 눈’식의 보복은 세상의 눈을 멀게 한다고 했다. 국민들의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정책이나, 효과성 없는 제도들도 좋은 의도로 추진되지만 반성과 개선의 과정이 빠지면 틀린 방법이 된다. 이는 결국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무능한 정치인과 행정, 혼란스런 교육 등은 아직 근본적인 문제와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듯하다.
또한 사회와 가정에서도 목표를 잃은 채 출세와 부의 성공을 지향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출세하려면 줄을 잘 서야한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돈이 곧 권력이다’라는 인식은 편법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또 다시 이를 합리화시킨다. 오늘도 아이들은 입시경쟁으로 청년들은 취업경쟁으로 중장년들은 출세경쟁 등으로 남에게 보여지는 삶을 위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려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와 명예에 대한 가치 인식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