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피아 편집국] 요즘 뉴스를 틀면 일단 한숨을 쉬거나 혀부터 차게 된다. 인기와 부를 누리며 유명세를 타던 이들이 온갖 의혹으로 민낮을 드러내며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그들의 어리석음에 안타깝기도 하다. 최근 이슈가 된 ‘버닝썬 사건’이나 ‘김학의 사건’ ‘故 장자연 사건’ ‘KT 채용비리’ 등 여러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행들은 곳곳에 뿌리박혀있어 ‘가지치기’정도로는 ‘과연 바뀌겠어?’라는 의심이 드는 게 어제오늘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간혹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며 가해자를 용서하는 ‘대인배’ 피해자도 있다. 이는 죄를 지은 사람이 진심으로 뉘우쳤을 때 그나마도 가능한 얘기다. 최근 이슈의 중심에 선 가수 정준영을 유독 용서하기 힘든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데다가 ‘죄송한 척’ 했다는 사실에 더 분노하게 한다. 이미 한번 용서한 국민들을 ‘호구’로 본 셈이다. 게다가 ‘승리의 단톡방’ 내용 중 ‘XX같은 한국법 사랑한다’ ‘우린 구속감’ 등의 발언들은 실수축에도 해당하지 않는데 ‘바보들끼리 부린 허세였다’ ‘여론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억울해한다.
타인의 불행에 무심코 기뻐하거나, 행복한 이야기보다 불행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정신병의 징후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상대가 누구냐에 상관없이 남의 불행에 기뻐하는 경우는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인과 자신을 같은 인간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이러한 심리는 연민의 감정도 없다. 타인들과 공감하지 못하고 세상의 중심은 ‘나’로 대변되는 ‘나르시시즘’이나 ‘소시오패스’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쉽게 부당한 아픔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다. 아무리 ‘돈이 최고’인 세상이고 ‘100세 시대’라지만 건강한 정신이야말로 진짜 행복일 것이다. 실수나 잘못을 저지른 타인에게 닥친 불행한 결과에 ‘인과응보’라며 ‘잘됐다’라고 침을 뱉고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막상 돌아서면 ‘내가 좀 심했나?’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지어 복수도 아닌 행복할 권리가 있는 타인에게 아픔을 주고 일말의 죄책감이 없는 삶이야말로 진짜 불행한 삶이 아닐까? 입장을 바꿔 한번만 생각해 봤더라면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옛 속담에 ‘남의 흉 한 가지면 제 흉 열 가지’라는 말이 있다. 흔히 남의 흉을 잘 보나 자기 흉은 따지고 보면 그보다 많은 사람이니 함부로 남의 흉을 보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은 그야말로 옛 말이 됐다. 흉이 될 만한 잘못인데도 죄가 아닌 사례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로 ‘법규를 어기고 저지른 잘못’을 ‘범죄’라고 한다.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반사회적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법망을 벗어나 처벌당하지 않는 행위는 흉이나 죄가 아닌 게 된다. 그렇다보니 재판에서 피해자가 피해자다워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에 바쁜 특권층 중심의 범죄들은 온전하게 드러나기도 힘들만큼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쌤통이다’라고 할 만한 처벌이 내려지길 바랄지경이다.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는 ‘범죄자’가 많아도 우리는 그냥 ‘나쁜 사람’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